'붉은사막'이 게임업계를 일깨우고 있다. 업계 사람들이 오랜만에 숫자보다 게임성을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동시접속자, 매출 등 숫자에 매몰됐던 이전 대화와 결이 다르다. 결국 오래 걸려도 "제대로 만든 게임이 정답"이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붉은사막은 이달 15일 기준으로 판매량 500만장을 돌파했다. 그러나 순탄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2019년 첫 공개 뒤 약 7년이나 걸렸다. 개발사 펄어비스는 지난해 영업손실 148억원을 기록했다. 3년 연속 적자였다. 이른바 '내년 출시 게임'으로 명명된 붉은사막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출시 직전 프리뷰 성적도 기대 이하였다. 펄어비스 주가가 하한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대반전이었다. 게임이 공개되고, 게임성이 부각되자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 9회말 투아웃에 만루홈런을 때린 셈이다. 메리츠증권은 이 게임의 판매량을 내년 연말까지 1230만장으로 전망하며 호평했다.
다시 업의 본질을 되새기는 움직임은 다른 곳에서도 감지된다. 지난달 31일 넥슨의 패트릭 쇠더룬드 회장은 프로젝트를 다시 추려 더 투자하거나 일부는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뜻은 선명하다. 될 게임에 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넥슨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이와 유사한 메시지가 업계 리더들 사이에서 실제로 돌고 있다.
돌아보면 한국 게임사들은 재무적 예측 가능성을 게임성보다 앞세웠다. 상장사 체제에서 분기 실적이 제일 중요했다. 서비스는 숫자로 성과를 증명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확률형 아이템이 한국 게임업계의 핵심 수익모델로 자리 잡았다. 이 수익모델은 게임 이용자의 지갑만 쳐다봤다. 빠른 숫자와 지표가 필요한 게임사는 재미보다 과금에 몰두했다. 많은 회사가 좋은 게임보다 빨리 돈을 버는 게임에 익숙해졌다.
그 후유증은 모바일 시장에서 먼저 나타났다. 센서타워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국내 모바일게임 매출 상위 10개 가운데 외산 게임이 5개를 차지했다. 외산 게임이 매출 톱10의 절반을 차지한 것은 2017년 이후 처음이었다. 현재도 모바일게임 매출 상위 10위 가운데 절반이 해외 게임이다.
그래서 붉은사막의 흥행은 숫자보다 의미가 큰 것이다. 시장은 잘 만든 게임에 반응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크게, 즉각적으로.
한국 게임업계 초창기 경쟁력은 분명했다. 남보다 먼저 효율적으로 돈 버는 장치를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남들과 다른 재미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했다. 과거 온라인게임 강국이라는 이름도, 중국 게임 시장을 두드리던 자신감도 거기서 나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업계는 매출을 관리하는 스킬에 능숙해졌다. 잘 팔리는 게임이 아니라, 잘 뽑히는 게임을 만드는 쪽으로 기울었다. 이제 붉은사막은 그 익숙한 질서를 흔들고 있다.
붉은사막이 불러온 것은 오래 잊고 있었던 상식의 귀환이다. 게임회사의 본업은 결국 게임을 잘 만드는 일이다. 숫자는 결과고 재미는 이유다. 한국 게임업계가 다시 강해지려면 확률표보다 세계관을, 손맛을, 그래픽을 이야기해야 한다. 붉은사막은 이미 뻔한 정답을 비싼 수업료 끝에 다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