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도체법 527억달러(69조원) 규모의 보조금 신청을 두고 국내 기업들이 복잡한 속내를 감추지 못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고 있어 보조금 신청이 불가피하지만, 기술 정보 공유와 초과이익 공유 등 까다로운 지급 조건이 걸림돌이다. 업계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추가 협상을 통한 독소조항 완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주목한다.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칩을 들어보이는 모습 / 조선일보DB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반도체 칩을 들어보이는 모습 / 조선일보DB
미국 상무부는 최근 반도체 제조시설에 대한 보조금 신청 관련해 기업 200곳 이상이 의향서를 신청했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은 반도체법을 통해 생산 보조금과 연구개발 지원금 등에 5년간 총 527억달러(69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3월 말부터 보조금 접수를 시작했고, 사전신청과 본신청, 기업 실사 절차 등을 거쳐 보조금을 지급할 계획이다.

보조금 신청 의향서를 제출한 기업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반도체 분야 글로벌 선두업체들은 대부분 신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SK하이닉스와 TSMC 등은 보조금 신청 의지를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TSMC는 미국 정부에 최대 150억달러(20조원)에 달하는 지원금을 요청할 전망이다. 미국 내 첨단 패키징 공장과 연구개발(R&D) 센터 등에 150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한 SK하이닉스도 보조금 신청 의사를 공식화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미국 투자 관련 부지 선정 등 적극적인 검토를 진행 중이다"며 "절차가 완료되는 대로 보조금을 신청할 예정이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170억달러 규모의 파운드리 공장을 건립 중인 것을 고려하면 보조금 신청 가능성이 높다.

기업들의 보조금 신청이 기정사실화 된 가운데 관건은 까다로운 지급 조건을 얼마나 유연화할 수 있는지 여부다. 미국은 보조금 지급 조건으로 반도체 시설 접근 허용과 초과이익 공유, 상세한 회계자료 제출 등을 제시했다. 이는 기업의 기술 정보 등이 노출되는 사안이라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 등은 민감하게 볼 수밖에 없다.

TSMC는 독소 조항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국 반도체 생산 비용이 대만보다 50% 가량 더 높은데, 초과 이익을 공유하게 되면 경제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여기에 반도체 제조 레시피까지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고 주장한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마큐 류 TSMC 회장은 미국이 조건을 완화하지 않을 경우 "워싱턴과 협력하는 것을 단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보조금 관련해 TSMC보다 더욱 악조건을 가지고 있다. 두 기업은 각각 중국 시안과 우시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는데, 미국 반도체법 시행에 따라 중국 투자 제한이 현실화할 경우 향후 10년간 중국 사업장의 첨단 반도체 생산 능력을 5%밖에 늘리지 못한다. 미국 정부의 관리와 감시 하에 들어가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 정부와 기업이 미국 정부를 상대로 보조금 관련 해법을 찾을 수 있을 지 주시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SK는 미국에서 반도체 생산시설 관련해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신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며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 반도체법에 대한 요건 완화 요구가 필요하며, 세부규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국내 기업에 유리한 조건이 반영되도록 협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혜원 기자 sunone@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