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형 게임사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신작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에 이태원 참사 당시 실제 현장 영상을 사용해 논란이 일고 있다. 가상의 전쟁 피해를 묘사하는 데 전쟁과 무관한 참사 기록을 끌어다 쓴 것이다. 과거 9·11 테러나 종교적 논란에는 게임 출시를 미루거나 문제 장면을 삭제하고 사과했던 행보와 대비된다. 회사가 비극을 가볍게 다룰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하면서도 영상 삭제·교체 계획은 밝히지 않은 가운데, 게임물관리위원회도 사안의 중대성에 공감한다며 관련 내용 검토에 나섰다.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신작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에 이태원 참사 당시 실제 현장 영상을 사용해 논란이 일고 있다. / 챗GPT 생성 이미지.
액티비전 블리자드가 신작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에 이태원 참사 당시 실제 현장 영상을 사용해 논란이 일고 있다. / 챗GPT 생성 이미지.

 

8초간 ‘이태원 참사’ 영상 삽입… 유가족·이용자 단체 반발

29일 게임업계 소식을 종합하면 지난 23일 출시된 모던 워페어 4의 도입부 영상에는 이태원 참사 현장을 다룬 뉴스 화면이 삽입됐다. 북한의 공격으로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상황을 전하는 가상의 뉴스에 실제 참사 영상을 사용했다.

액티비전의 신작 게임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에 포함된 이태원 참사 현장 장면. 실제 참사 영상과 인물의 위치 및 구도가 동일해 논란이 일고 있다. / 유튜브 화면 캡처
액티비전의 신작 게임 ‘콜 오브 듀티: 모던 워페어 4’에 포함된 이태원 참사 현장 장면. 실제 참사 영상과 인물의 위치 및 구도가 동일해 논란이 일고 있다. / 유튜브 화면 캡처

해당 장면에는 도로에서 심폐소생술(CPR)을 하는 사람들과 경찰 통제선, 쓰러져 있는 피해자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참사 당시 구조 활동과 피해 상황을 담은 기록이 게임 속 전쟁 피해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쓰인 것이다. 영상 14분 30초부터 약 8초간 문제의 장면이 확인된다.

유가족과 시민단체, 게임이용자 단체는 반발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28일 성명을 내고 해당 장면의 삭제를 요구했다. 실제 참사의 비극을 오락용 게임의 소재로 사용한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한국게임이용자협회도 영상 사용 경위에 대한 설명과 사과를 촉구했다.

이철우 한국게임이용자협회장은 “회사 측의 공식 사과와 함께 패치를 통한 빠른 영상 수정·교체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며 “개발사의 의지만 있다면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과 무관한 실제 참사 영상을 사용한 이번 사안을 창작 영역의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 협회장은 “해당 권리를 인정받으려면 창작자의 명확한 의도와 작�� 맥락상 반드시 필요한 연출이어야 한다”며 “무단 삽입한 실제 참사 영상까지 창작의 자유로 포장할 수는 없다”고 했다.

액티비전은 실제 뉴스 영상을 작품 속 가상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한 요소로 활용했다고 해명했다. 이태원 참사를 비롯한 실제 비극을 언급하거나 가볍게 다룰 의도는 없었다는 설명이다. 다만 28일 공개된 입장에는 유가족에 대한 사과나 영상 삭제·교체 계획은 담기지 않았다.

게임물관리위원회도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관련 내용 검토에 나섰다.

게임위 관계자는 “해당 게임물은 등급분류 업무를 위탁받은 민간 기관인 게임콘텐츠등급분류위원회에서 등급 결정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며 “문제의식과 사안의 중대성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며, 관련 내용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9·11 땐 건물 외관 바꾸고 컷신 편집… 자국엔 민감, 타국 참사엔 무감각

액티비전의 이번 대응은 과거 비극적 사건이나 문화·종교적 논란에 대응했던 방식과 차이를 보인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액티비전을 비롯한 주요 게임사들은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세계무역센터(WTC)를 연상시키는 게임 속 장면이나 뉴욕 도심을 담은 패키지 표지를 수정했다.

수정된 액티비전의 ‘스파이더맨 2: 엔터 일렉트로’ 게임 배경.  액티비전은 두 건물을 연결하는 구조물을 추가해 유사성을 낮추고 대사를 수정했다. / 커뮤니티 화면 캡처
수정된 액티비전의 ‘스파이더맨 2: 엔터 일렉트로’ 게임 배경.  액티비전은 두 건물을 연결하는 구조물을 추가해 유사성을 낮추고 대사를 수정했다. / 커뮤니티 화면 캡처

액티비전은 당시 9월 18일 출시 예정이던 ‘스파이더맨 2: 엔터 일렉트로’의 발매까지 미뤘다. 최종 보스전의 배경이 세계무역센터를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회사는 게임 속 건물이 폭발하거나 무너지지는 않지만, 세계무역센터로 오인될 수 있는 이미지에도 신중하게 대응하겠다며 내용 수정을 발표했다.

논란이 된 콘텐츠를 삭제하고 사과한 사례는 이후에도 있었다. 2021년 ‘콜 오브 듀티: 뱅가드’에서는 이슬람 경전인 쿠란의 페이지가 바닥에 흩어진 장면이 문제가 됐다. 액티비전은 해당 콘텐츠를 삭제하고 무슬림 공동체에 사과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내부 조치를 취하겠다고도 밝혔다.

2024년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6’ 베타 테스트 때는 9·11 테러를 연상시킨다는 지적을 받은 프로필 장식 이미지가 수정됐다. 비행기와 건물 등이 담긴 부분이 빠졌다. 당시 액티비전과 개발사 트레이아크는 구체적인 변경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업계 안팎에서는 액티비전이 자국과 연관된 비극이나 정치·종교적 논란에는 민감하고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반면, 타국의 참사나 문화적 맥락에는 윤리적 경각심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패치로 수정 가능… 기술보다 제작사 판단의 문제”

비극적 참사를 상업적 소재로 악용했다가 시장에서 퇴출된 사례도 적지 않다. 2018년 출시를 예고한 1인칭 슈팅게임(FPS) ‘액티브 슈터’가 대표적이다. 미국 플로리다주 파크랜드 고교 총격 참사 약 석 달 뒤, 이용자가 학교 총격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게임이 공개되자 유가족 등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일었다. 온라인 반대 청원 서명자가 28만 명을 돌파하는 등 논란이 커지자, 스팀은 게임 출시를 차단하고 개발·배급사를 플랫폼에서 즉각 제명했다.

이외 2009년 이라크전 실제 전투를 게임화하려 했던 ‘식스 데이즈 인 팔루자’ 역시 참전 군인과 반전 단체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유통사인 코나미가 퍼블리싱을 포기한 바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액티비전이 해당 장면을 교체하거나 자진 삭제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관측이 나온다. 영상 수정이 기술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제작사가 논란을 감수하면서까지 수정에 나설 유인이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게임업계 한 관계자는 “실물 패키지라도 스팀이나 콘솔(게임기) 온라인 스토어를 통한 수정 패치 배포는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면서도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문화적 민감성을 대하는 개발사의 인식이다. 해당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에 가깝다”고 꼬집었다.

천선우 기자
swchun@chosunb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