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프·푸조 등을 거느린 자동차 기업 스텔란티스는 지난달 중순부터 스페인 사라고사 공장에서 중국 립모터의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B10' 생산을 시작했다. 1982년 독일 오펠의 소형차 코르사를 만들기 시작해 40년 넘게 유럽 브랜드 차를 생산해 온 공장이 중국차의 유럽 공략 기지가 된 것이다. 스텔란티스는 이 공장에서 립모터의 또 다른 전기차 'B05'도 생산할 계획이다. 스텔란티스의 생산시설과 판매망에 립모터의 전기차 기술을 결합해 유럽 시장을 함께 공략하겠다는 전략이다.
1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완성차 기업들이 중국 업체와 손잡는 범위가 신차 개발부터 해외 생산까지 전방위적으로 넓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중국에 차를 팔기 위해 현지 업체와 합작사를 세웠지만, 이제는 중국의 기술과 부품망을 활용해 중국 밖에 팔 차까지 만든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중국차가 가격과 개발 속도에서 앞서가자, 기존 완성차 기업들이 아예 그 경쟁력을 빌려 쓰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며 "중국차와 싸우기 위해 중국과 손잡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中 기술 빌려 개발비, 시간 절감
전통적인 완성차 기업들이 중국에 손을 내미는 가장 큰 이유는 개발 시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독일 폴크스바겐은 중국 전기차 업체 샤오펑과 전기차 'ID. UNYX 09'를 2년이 채 안 돼 개발했다. 폴크스바겐 관계자는 "중국에서 차를 개발하고 설계 초기부터 부품업체를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일부 신차의 개발비를 최대 50%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스텔란티스 산하 오펠도 립모터와 중형 전기 SUV를 개발하고 있는데, 오펠 경영진은 2년 안에 신차를 내놓겠다며 속도를 강조했다.
중국 기술을 받아들이는 범위는 차량의 기본 구조부터 주행보조 기능까지 점차 넓어지고 있다. 볼보자동차는 지난달 23일 지리와 협력해 중국 기술과 주행보조 기능을 적용한 현지 전용 신차를 개발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장 내년 중순에 2개 차종을 공개하고 본격 생산에 돌입한다. 올해 3분기 중국 매출이 전년 대비 절반 가까이 줄어든 볼보는 지리와 부품 공급망도 공유해 비용을 낮추기로 했다. 르노는 지난 9월 브라질 공장에 지리의 차량 기본 구조인 'GEA 플랫폼'을 도입했다. 지리 차량을 먼저 만들고, 내년부터는 같은 구조를 바탕으로 르노 신차도 생산한다.

◇전통 車 기업들, 中과 생산망도 서로 공유
중국 업체들도 이런 협력을 통해 해외 생산기지를 확보하고 있다. 포드는 지난 7월 지리와 스페인 발렌시아 공장에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포드 차량 3종과 지리 전기차 2종을 생산할 계획으로, 당국의 승인 등을 거쳐 2028년 첫 신차를 만들 예정이다. 포드는 공장 가동률을 높이고 개발비를 나눌 수 있고, 지리는 포드의 공장에서 유럽에 팔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
기존 완성차 업체들도 중국 생산망을 해외 시장 공략에 활용하고 나섰다. 메리 배라 GM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20일 실적 발표에서 남미의 중국차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쉐보레 차량을 중국에서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텔란티스도 둥펑과 중국 우한 공장에서 내년부터 푸조·지프의 전기차 등 신차를 각각 2종씩 생산해 중국과 해외에 팔 계획이다. 중국 업체는 유럽 생산기지를 얻고, 미국·유럽 완성차 업체는 중국의 개발·생산 기반을 세계시장 대응에 활용하는 구조다.
중국 차 업체와의 협력 효과가 일찌감치 나타난 곳도 있다. 스텔란티스가 올해 3분기 유럽 판매점 등에 공급한 차량은 58만8000대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만4000대 늘었다. 이 중 립모터가 3만4000대로, 늘어난 물량의 약 63%가 중국 브랜드에서 나온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없진 않다. 폴크스바겐과 샤오펑의 첫 공동 모델 'ID. UNYX 08'은 당초 월평균 목표를 3600대 넘게 잡았지만 지난 4월 출시 후 8월까지 월평균 267대 팔리는 데 그친 것으로 전해졌다.
업계 관계자는 "이제 중국 업체는 단순한 경쟁자가 아니다"며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는 경쟁상대이면서도 일부 전통 완성차 기업에는 부족한 전기차 라인업과 생산 물량을 채워주는 파트너가 되고 있다. 다만 중국차보다 가격·기능·판매망에서 밀리면 소비자에게 외면받을 수 있는 만큼, 중국 업체와의 협력으로 줄인 시간과 비용을 실제 상품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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