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인공지능(AI) 투자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지만, 월가에서는 투자 규모보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지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동안 AI 데이터센터를 많이 짓고 반도체를 확보할수록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투자 경쟁이 차입까지 동원할 정도로 커지면서 분위기가 달라진 것이다. 투자 규모만큼 현금 창출 능력과 재무 건전성을 꼼꼼히 따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29일(현지 시각) 로이터통신·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최근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실적 발표 이후 주가 흐름이 엇갈렸다. 구글 모회사 알파벳은 이날 주가가 12.3% 급락한 반면, 오라클은 전날 약 11% 올랐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이날 0.2% 하락했다.
◇ AI 투자 경쟁에 불어난 비용… 수익성 검증 본격화
월가의 평가 기준이 달라진 배경엔 급격히 커진 AI 인프라 투자에 따른 자금 부담이 있다. 빅테크 기업들은 AI 모델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센터와 반도체를 확보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경쟁사보다 먼저 컴퓨팅(연산) 인프라를 확보해야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문제는 AI 투자 규모가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이는 현금을 넘어설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일부 기업은 데이터센터 건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회사채 발행 등 외부 자금 조달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월가에선 잉여현금흐름(FCF)이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떠오르고 있다. 잉여현금흐름은 기업이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에서 설비 투자 등에 사용한 돈을 제외하고 남은 자금이다. 이 돈이 충분해야 추가 투자에 나서거나 빚을 갚고 주주에게 배당할 여력도 생긴다.
◇ 같은 AI 경쟁, 다른 성적표… 현금 여력이 관건
실제로 알파벳은 올해 3분기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의 121.4%를 설비 투자에 사용했다. 이는 영업활동으로 100달러를 벌었다면 데이터센터 설립 등에 121달러 이상을 썼다는 의미다. 이때 부족한 자금은 보유 현금이나 외부 차입 등으로 충당해야 한다.
알파벳의 3분기 잉여현금흐름은 마이너스(-) 90억7000만달러(약 12조원)를 기록했다. 지난 2분기에 이어 2개 분기 연속으로 잉여현금흐름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다. 올해 설비 투자 규모는 최대 2050억달러(약 274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구글 검색 매출 증가율은 3분기 12%로 시장 예상치인 14.7%를 밑돌았다.
반면 MS는 막대한 AI 투자에도 현금 창출 능력을 유지해 알파벳과 다른 평가를 받았다. MS는 최근 발표한 2027회계연도 1분기 잉여현금흐름이 186억달러(약 25조원)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월가 예상치를 약 100억달러(약 13조원) 웃도는 수준이다. 같은 기간 데이터센터 등 컴퓨팅 인프라 확충에 452억달러(약 60조원)를 투입했지만, 영업활동으로 벌어들인 현금에서 설비 투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금융리스를 제외하면 68%였다.
특히 MS의 AI 투자는 실제 매출 증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MS의 클라우드 사업인 애저(Azure)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48% 증가해 시장 전망치를 웃돌았다. 기업들이 AI 기술을 시험하는 단계를 넘어 실제 업무에 도입하면서 컴퓨팅 서비스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다.
멜리사 오토 S&P글로벌 비저블알파 리서치 책임자는 "알파벳과 MS의 실적은 매우 대조적"이라며 "MS는 매우 절제된 성장을 보여준 반면, 구글은 현금을 소진하고 핵심 사업 실적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다만 MS도 250억달러(약 33조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금 창출 능력이 뛰어난 기업조차 추가 자금 조달을 검토해야 할 만큼, AI 인프라 투자 경쟁이 치열해진 것이다. 이 밖에 오라클은 외부 자금 조달 규모에 상한을 두고 2028회계연도 하반기부터 잉여현금흐름이 흑자로 전환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면서 투자자들의 우려를 덜었다.

◇ 美 빅테크의 투자 결정에 달린 韓 반도체 수요
월가의 시각 변화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중요한 변수다. 미국 빅테크가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확대할수록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업들이 수익성 악화를 이유로 투자를 줄이면 국내 반도체 수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은행도 이런 위험을 경고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26일 안도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서면 답변에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AI 투자가 내년에 둔화할 경우 한국의 반도체 수출액이 기존 전망보다 500억~1000억달러(약 67조~134조원) 감소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경우 내년 한국 경제성장률도 기존 전망보다 약 0.4%포인트 낮아질 것으로 추산된다.
다만 AI 투자에 대한 월가의 평가가 엄격해졌다고 해서 관련 수요가 곧바로 줄어드는 건 아니다. 실제로 MS의 클라우드 사업은 높은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고, 알파벳의 구글 클라우드 매출도 전년 동기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영국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미툴 코테차 아시아 거시경제 전략 책임자는 "시장이 AI 투자에 따른 수익을 더욱 선별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했다. AI 산업의 성장 가능성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지만, 앞으로는 막대한 투자금을 실제 수익으로 연결하고 추가 투자 여력까지 입증하는 기업이 시장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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