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가 인공지능(AI) 시장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고 있습니다. AI 기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려는 구상이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죠. 최근에는 AI 데이터센터 냉각설비의 대형 공급계약을 따내는 등 가시적인 성과도 거뒀습니다. 업계에서는 '가전에서 AI로' 사업을 확대하는 전략이 비교적 빠르게 성과를 낸 배경으로 수십 년간 제조업에서 쌓아온 기술과 노하우를 꼽습니다. 사업구조 개선으로 다진 수익 기반은 신사업 투자 여력을 키웠고, 핵심 부품 기술과 제조 역량은 데이터센터와 로봇 시장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는 겁니다.

1일 LG전자에 따르면 올해 3분기까지 AI 데이터센터 냉각솔루션 누적 수주액은 3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올 상반기 6000억원 수준에서 한 분기 만에 조 단위로 수주액이 불어난 겁니다. 지난달 발표한 북미 인프라 기업 '에어 컨트롤 콘셉트'(AIR Control Concept)와의 장기공급계약도 여기에 포함됐습니다.

에어 컨트롤 콘셉트는 데이터센터의 설계·구축부터 조달과 사후 서비스까지 맡는 기업입니다. LG전자는 이 회사와의 계약에 따라 총 5기가와트(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에 고효율 칠러 등 냉각설비를 순차적으로 공급합니다. 수주의 상당 부분이 장기계약인 만큼 앞으로 수년에 걸쳐 매출로 이어질 물량을 확보한 셈입니다. 작년 수주한 또 다른 북미 대형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는 올해부터 냉각설비를 공급·설치하고 있습니다.

◇ 15년 키운 칠러, 장비 판매 넘어 설계·유지보수로

LG전자가 칠러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2011년 LS엠트론 공조사업부를 인수하면서입니다. 가정용·상업용 에어컨에서 대형 건물과 산업시설의 냉각으로 사업 범위를 넓히는 계기를 만든 것이죠. 이후 원전과 배터리 공장 등으로 공급처를 넓혀왔고, 최근에는 AI 투자 확대에 따른 데이터센터 수요가 더해졌습니다. 15년간 키운 냉난방공조(HVAC) 역량이 새로운 시장을 공략하는 기반이 된 셈입니다.

칠러는 차가운 물을 만들어 건물이나 설비의 열을 빼내는 대형 냉각기입니다. AI 데이터센터에서는 고성능 반도체를 밀집시켜 가동할 때 발생하는 열을 처리하는 데 씁니다. 열을 제때 식히지 못하면 반도체 성능이 떨어지고 운영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습니다. LG전자 관계자는 "냉각 대상과 규모는 달라졌지만, 압축기와 열교환기의 효율을 높이고 냉매의 흐름을 제어하는 기술은 에어컨 사업부터 다져온 자산"이라고 설명했습니다.

LG전자는 최근 칠러를 넘어 반도체에 직접 맞닿는 냉각장비까지 공급 범위를 넓히는 '칩 투 칠러(Chip to Chiller)' 전략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칩에 붙인 콜드플레이트(냉각판)가 열을 냉각수로 전달하면, 냉각수 분배장치(CDU)는 서버 쪽 냉각수의 온도와 흐름 등을 관리합니다. 칩에서 발생한 열을 시설 밖으로 내보내기까지 필요한 장비를 한꺼번에 공급할 수 있다는 게 LG전자의 장점으로 꼽힙니다.

여기에 냉각설비 전반의 설계·제어와 유지보수까지 맡는 통합 솔루션 사업도 추진합니다. 현재 칠러 중심인 매출에 서비스 수익을 더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엔비디아와 협력해 판로도 넓히고 있습니다. LG전자는 국내 기업 최초로 600킬로와트(㎾)·1메가와트(㎿)급 CDU의 엔비디아 규격 승인을 받은 데 이어, 2.6㎿급 제품도 차세대 AI 데이터센터 설계 기준에 맞춘 'DSX 레디' 승인을 확보했습니다. 지난 9월에는 전력·냉각 분야 공식 파트너로 등록됐습니다. 엔비디아가 데이터센터 고객에게 검증된 업체와 장비를 연결하는 생태계에 LG전자가 이름을 올린 겁니다.

생산기반도 확대하고 있습니다. LG전자는 총 2200억원을 들여 미국 버지니아주 윈저에 칠러 공장을 구축하고, 국내 평택·창원에는 생산라인을 신설하고 설비를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미국 공장은 내년 상반기 생산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늘어난 주문을 소화할 생산능력을 확보하면서 주요 고객이 모인 북미에 공급 거점도 마련하는 것이죠.

LG전자의 고성능 칠러 등 냉각 솔루션이 적용된 가상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이미지. LG전자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칠러 공장을 신설하고 국내 평택·창원 생산라인을 확대하는 데 총 1500억원을 투자한다./LG전자
LG전자의 고성능 칠러 등 냉각 솔루션이 적용된 가상의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이미지. LG전자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칠러 공장을 신설하고 국내 평택·창원 생산라인을 확대하는 데 총 1500억원을 투자한다./LG전자

◇ 세탁기 모터가 로봇 관절로… 학습 데이터 목표도 5배로

LG전자가 AI 데이터센터 냉각 시장에 에어컨에서 쌓은 열관리 기술을 활용했다면, 세탁기 등에 쓰이는 모터 기술은 로봇 분야에 진출하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올해 초 공개한 액추에이터 브랜드 '악시움(AXIUM)'이 대표적입니다. 액추에이터는 모터·감속기·제어장치 등을 결합해 로봇의 움직임과 힘을 조절하는 부품으로, 사람의 관절과 근육 역할을 합니다. 로봇의 몸체에 들어가는 만큼 작은 공간에서 힘을 내면서도 무게와 발열을 줄여야 합니다.

LG전자는 약 60년간 쌓은 모터 설계·제어 기술과 대량생산 경험을 이 사업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관절용과 바퀴용을 합쳐 크기와 출력 등이 다른 9종의 제품군을 마련했으며, 올해 상반기 창원에 시험생산라인을 갖췄습니다. 이를 토대로 설비 자동화와 품질 검증 등 양산 준비를 진행하고, 글로벌 잠재 고객을 대상으로 수주 활동도 병행하고 있죠.

로봇이 일을 익히려면 구동부품뿐 아니라 학습 데이터도 갖춰야 합니다. 세탁물을 집거나 부품을 조립할 때는 물체의 모양과 위치를 알아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힘을 줘야 하는지까지 판단해야 하는 것이죠. 글·이미지와 달리 이런 동작 데이터는 대량으로 모으기 어렵습니다. 실제 작업을 반복하며 움직임과 결과를 기록하고, 여러 조건에서 검증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LG전자는 이 과정에 생산 공정과 숙련공의 작업 노하우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서울 우면동에 구축한 로봇 학습시설 '데이터팩토리'가 그 무대입니다. 이 시설은 3분기 부분 가동에 들어갔고, 4분기 본격 가동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가정과 테네시 세탁기 공장의 제조환경을 재현한 공간을 만들고, 홈로봇 '클로이드(CLOiD)'를 투입해 청소하거나 부품을 옮기고 적재·조립하는 작업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집한 실제 데이터를 엔비디아의 로봇 AI 기술로 증강·합성해 학습에 활용합니다. LG전자는 연말까지 실제 수집분과 가상으로 생성한 데이터를 합쳐 50만 시간 분량을 확보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8월 잡았던 기존 목표치를 두 달 만에 5배 높여 잡은 것입니다. 데이터팩토리는 우선 자체 로봇의 성능을 높이는 데 활용하고, 외부 고객 대상 유료 실증 등 사업화는 중장기적으로 검토한다는 방침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장녀인 매디슨 황 엔비디아 수석이사가 18일 서울 서초구 LG 데이터팩토리를 방문, 'LG 클로이드(CLOiD)' 로봇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후 사인하고 있다. 이날 매디슨 황은 클로이드 로봇에 '어메이징 LG'라는 문구를 남겼다. (LG전자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2026.8.18 ⓒ 뉴스1
지난 8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장녀인 매디슨 황 엔비디아 수석이사가 서울 서초구 LG 데이터팩토리를 방문, 'LG 클로이드(CLOiD)' 로봇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후 사인하고 있다./LG전자

◇ 구독·플랫폼 키우고 전장 이익 늘려… 신사업 투자 뒷받침

냉각설비를 증설하고 로봇의 상용화를 앞당기려면 꾸준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LG전자는 기존 사업에서 수익원을 넓히고 원가 경쟁력을 높여 이 재원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가전에서 쌓은 기술뿐 아니라 돈을 버는 구조를 바꾼 것도 AI 사업 확대의 밑천인 겁니다.

LG전자는 TV 사업 회복과 전장 성장으로 가전·공조의 이익 감소를 메웠습니다. TV를 담당하는 MS사업본부는 올 3분기 1467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전년 대비 흑자로 돌아섰습니다. 전장을 맡는 VS사업본부도 수주 물량의 매출 전환과 원가구조 개선에 힘입어 영업이익이 27.2% 늘어난 1903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연결 자회사인 LG이노텍을 제외한 LG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7036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1% 증가했습니다.